패트릭 유잉(1962년 8월 5일 자메이카 킹스턴 출생)은 전 미국/자메이카 프로 농구 선수로, "고릴라"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센터로 활약했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1985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뉴욕 닉스에 지명되어 뉴욕 닉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올랜도 매직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루키 시즌에 NBA 올해의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고, NBA 올스타팀에 11회, NBA 올해의 퍼스트 팀에 6회, NBA 올해의 세컨드 팀에 3회 선정되었으며, 1984년과 1992년 미국 대표팀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두 차례 획득했습니다.
2002년 9월 18일, 패트릭 유잉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키 2.13미터, 몸무게 116킬로그램에 다재다능하고 뛰어난 바운싱 능력은 물론 센터에게 필수적인 침착함까지 갖춘 전형적인 현대식 센터였으며, NBA에서 '뉴욕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헌신적인 선수였습니다. 2003년 2월 28일, 뉴욕 닉스는 유잉의 NBA에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 33번을 영구결 변하고 은퇴했습니다.
2013년, 패트릭 유잉은 샬럿 호네츠의 어시스턴트 코치생활을 했으며, 2017년 4월부터 2023년 3월까지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의 감독으로 재직하였습니다. 2021년 10월, 유잉은 NBA의 75대 슈퍼스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11살에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자메이카 출신입니다. 자메이카 억양이 매우 강한 유잉은 어렸을 때부터 반 친구들 및 선생님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축구와 크리켓 선수로 활동하던 유잉은 13살 때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했고, 그 후 신장이 급성장해 친구들은 유잉이 농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 유잉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미국 남자 올림픽 대표팀에 응시했고, 최종 선발에는 실패했지만 고등학생으로는 유일하게 남자 올림픽 농구 대표팀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주 챔피언십을 세 번이나 차지하면서 전국의 대학 코치들이 유잉에게 호감을 보였고, 고등학생 시절에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 뉴욕 타임즈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1981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라틴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잉은 미국 최고의 농구 학교 중 하나인 조지타운 대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조지타운의 존 톰슨 감독은 유잉이 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언론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그 결과 이후 17년 동안 유잉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실제 경기에서도 기자들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등 언론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1982년, 패트릭 유잉은 신입생 신분으로 조지타운을 NCAA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마지막 순간 노스캐롤라이나에 1점차로 패했고, 결승 득점은 유잉이 평생 '증오'해왔던 마이클 조던이 성공시켰습니다. 1984 년 조지 타운은 NCAA 결승전에서 마침내 그의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을 맛보았습니다. 1985 년에 조지 타운은 다시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우승하지는 못했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1985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뉴욕 닉스의 지명을 받아 데뷔 시즌 평균 20점, 9리바운드, 2 어시스트, 1.08 스틸, 2.06 캡을 기록했으며, 그해 올해의 신인 선수에 선정되었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1989-90시즌 경기당 평균 28.6점 10.9 리바운드 3.99개의 3점 슛과 55.1%의 야투율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 모든 부문에서 상위 6위 안에 든 유일한 선수였습니다. 닉스는 1990년 3월 24일 셀틱스와의 경기에서 커리어-하이인 51점을 기록했습니다.
1993-94 시즌에는 패트릭 유잉이 경기당 평균 24.5점 11.2 리바운드 2.75블록슛을 기록하며 닉스의 정규시즌 57승 25패를 이끌었고, 찰스 오클리와 유잉이 농구를 지배하면서 닉스는 "동부의 야수"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정규 시즌에서 동부 컨퍼런스 최고의 승률을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1994-95 시즌에도 닉스는 55승 27패로 정규시즌을 마쳤지만,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페이서스를 다시 만났고, 7차전에서 유잉의 마지막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홈에서 2점 차 패배를 당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1996년 11월 19일 올랜도 매직과의 경기에서 유잉은 통산 득점 20,000점을 돌파했고, 통산 리바운드도 10,000개를 돌파했습니다.
1997-98 시즌은 유잉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되는 시즌이었는데, 손목 골절로 인해 시즌 대부분을 전력에서 이탈했고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1998-99 시즌에는 NBA 노사 분쟁으로 시즌 개막이 지연되었고, 유잉은 선수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데 기여하여 NBA 정규 시즌이 50경기로 축소되었습니다.
1999-00 시즌은 유잉의 15번째이자 닉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는데, 스프리웰 등이 팀의 주축으로 성장하고 유잉의 경기력이 떨어지자 뉴욕 팬들은 노쇠한 유잉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62경기 15점 9.7 리바운드는 전성기 때의 활약과는 거리가 먼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NBA 역사상 10번째로 22,000점 이상을 득점하고 10,000 리바운드를 돌파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2000-01 시즌, 유잉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입단해 커리어의 마지막 풀시즌을 보냈지만 경기당 9.6점 7.4 리바운드라는 기록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올랜도 매직은 2001-02 시즌에 유잉과 2 년 473 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지만 2001-02 시즌이 끝나기 전에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유잉은 매직과의 계약을 중단했습니다.
2002 년 9 월 18 일, 유잉은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유잉은 통산 1183 경기 출전, 총 득점 24815 점, 경기당 평균 21.0 점, 경기당 평균 9.8 리바운드, 경기당 어시스트 : 1.9, 총 모자 : 2894, 필드에서 50.4 %, 자유투 성공률 74.0 % 룰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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