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스미츠 (1966 년 8 월 23 일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출생)는 농구 선수입니다 페이서스 클럽의 센터로 뛰고 있습니다.
그는 1988년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사보니스와 함께 떠오르는 유럽 유망주로 꼽혔습니다. 첫 시즌에 그는 꽤 좋은 활약을 펼치며 1989년 신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습니다. 스미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흑인 선수들이 주를 이루는 NBA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2.24m의 큰 키에도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래리 버드가 페이서스의 지휘봉을 잡을 때까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인이었던 버드와 스미츠는 마음이 통했는지도 모릅니다. 버드는 스미츠에게 숨어 있던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를 뒤에서 전면으로 밀어내 주전으로 선발 라인업에 투입했습니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스미츠는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동료들과 힘을 합쳐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떠오르는 불스에게 아쉽게 패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릭 스미츠는 12년간의 농구 커리어 내내 페이서스에서 뛰며 매우 헌신적인 선수였습니다. 페이서스에서 첫 시즌을 보낸 스미츠는 곧바로 팀의 주전 센터로 발돋움하여 정규 시즌 82경기에 모두 출전했습니다. 1997년 3월 30일 클리퍼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00번째 득점을 기록했고, 1998년에는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올스타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스미츠는 페이서스에서 12시즌을 뛰며 10번의 플레이오프에 출전해 경기당 14.8점 5.2 리바운드의 통산 기록을 남겼고, 93년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당 평균 22.5점 8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으나 초반 부상으로 인해 출전 시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체력의 영향을 받은 스미츠의 출전 시간은 더 제한적이었고 기록은 더 평범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여전히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기존의 밀러를 제외하면 페이서스 팀에서 가장 꾸준한 활약을 펼친 선수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 페이서스가 동부 컨퍼런스의 강호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스미츠의 꾸준한 활약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8년 NBA 드래프트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라운드 2순위로 스미츠를 지명했습니다. 페이서스에서 슈미츠는 스티브 스티파노비치의 백업으로 시작했지만 스티파노비치가 부상으로 커리어를 마감한 후 스미츠는 주전 센터로 활약했고, 루키 시즌에 슈미츠는 82경기 중 71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평균 경기당 평균 11.7점 6.1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루키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스미츠는 해마다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유지했지만, 1993-1994 시즌이 되어서야 진정한 팀 리더로 거듭났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 페이서스가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던 시절, 스미츠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페이서스 팀에서 레지 밀러에 이어 두 번째로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았습니다.
1995-96시즌 스미츠의 경기당 최고 득점인 18.5점은 NBA 슈퍼스타들보다는 약간 낮았지만 뛰어난 플레이오프 활약으로 페이서스 팬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1998년 스미츠는 NBA 올스타에 선정되어 10점 7 리바운드 4 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선수 생활 내내 발 부상에 시달렸던 스미츠는 1999-2000시즌 레 LA 레이커스에 2-4로 패한 후 은퇴했습니다.
스미츠는 팬들의 투표로 진행된 페이서스 40주년 기념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레지 밀러, 멜 다니엘스, 저메인 오닐에 이어 4위를 차지했습니다.
스미츠는 1995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에서 올랜도 매직을 이겼습니다. 당시 경기는 양 팀이 마지막 13.3초 동안 5번이나 리드를 주고받는 등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습니다. 먼저 브라이언 쇼가 3점 슛을 성공시켜 매직이 90-89로 앞서나갔지만 밀러가 곧바로 3점을 추가했고, 경기 종료 5.2초를 남기고 앤퍼니 하더웨이가 3점 슛을 성공시켜 93-92로 동점을 만들었으며, 경기 종료 1.3초를 남겨두고 스미츠가 마침내 결승 득점을 성공시켜 경기 종료 휘슬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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